작가노트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면서 시작된 선(線)긋기의 작업은 나의 몸속에 각인 되어, 먹 이외의 채색화, 그리고 재료들을 바꾸어도 계속 된다. 나에게 선(線)이란 나의 춤이고 나의 모든 것이고 일탈이다.

제작기법은 어릴 때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하던 긁어내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전문가들은 ‘스크라비토 기법’이라고 말해 주시던데, 사실 그런 용어에 나는 별반 신경쓰진 않는다. 아무튼 난 이 기법이 재미있다. 밑색을 칠하고 마른후에 색을 얹어 놓고는 얹은 색이 마르기전에 신나게 난장을 치고 나면, 수백 수만의 선들이 생긴다. 그리고 마르길 기다려 마음에 드는 선들만 챙기고 나머지 선들은 다시 덮어둔다. 이렇게 작품이 탄생 되는데, 요즘은 의식적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난장을 친다. 그렇게 탄생 되는 이미지들은 구체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마치 이미지가 해체 된듯하기도 하고, 재결합 하는듯한 느낌이 난 참 좋다. 언젠가는 분해되고 해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들의 노래라고 하면 좋을까?
2012.04.19

Dancing on the Moon

구체적 이미지의 해체와 의미의 재조합
-색면과 선의 율동

권은희의 작업은 차가운 빙판 위를 지나간 날선 스케이트 자국을 연상시킨다. 파란 화면 가득 들어찬 얽힌 선들. 작품 안에서 보여 지는 부분은 파란 색면에 드러난 선들이 전부다. 그러면 이제 작가 권은희가 보여준 단서를 따라 드러나지 않은 작가의 은밀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Dancing on the Moon, 작가가 그의 작업에 부친 타이틀이다. 그러나 화면 어디에도 춤추는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빠르고 느린, 굵고 가는, 둥글고 날선 선들의 흔적만이 작위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상상을 더해 보자. 우리는 그의 파란 화면에서 모든 차가움에 대한 가치들을 연상할 수 있다. 모든 차가움은 빛의 반대편 어둠 속에 서 있다. 차가움은 모든 것을 반사시킨다. 물질적 차가움이란 빛의 반사이다. 남극의 빙산은 뜨거운 태양열을 우주로 반사시키고, 달은 태양의 강렬한 빛을 지구로 반사한다. 정서적 차가움이란 타인의 호의에 대한 반사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태도에서 차가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타인에 대한 의미의 전달이 그의 내면에서 가공되어 나오지 않고 직접적으로 반사되기 때문이다.

물과 빙판과 달은 파란 색으로 그리고 차가움이라는 가치로 연결되어 있다. 권은희의 작업은 차가움 위에서 펼쳐지는 생명을 위한 드라마이다. 차가움의 바탕위에 수없이 많은 선들의 교차된다. 화면위의 선들은 시간의 선후에 따라 이미 지나간 선들을 덮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선들의 교차는 시간의 흐름을 드러낸다. 무엇인가 지나간 흔적, 무엇인가 한때는 열정적 움직임이 있었기에 그 공간은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환원된다. 움직임의 반대편엔 멈춤이 있다. 생명의 순환에서 멈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특히 물속에서 혹은 빙판위에서의 멈춤은 고요와 적멸로 들어가는 죽음의 공간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끝없는 움직임은 생명의 율동을 만들어내고 율동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율동이란 곧 춤이다. 기쁨의 춤이든 슬픔의 춤이든 환희에 겨워 깊은 무의식에 의해 표출되는 움직이든 혹은 애수에 가득한 몸짓의 표현이든 율동은 춤이 되어 나타난다. 그 율동을 의미 있는 것으로 읽어내는 가치창조는 수용자의 몫이다. 우리는 그의 화면에 남겨진 선들을 통해 어떠한 의미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권은희는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직접적 이미지를 통한 소통의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가 사용되는 순간 우리는 상상력을 상실한다. 나아가 상상력의 상실은 표현이 주는 의미의 깊이를 제약한다. 누군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달 표면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구체적 형상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사고는 그 누군가에 또는 이미 알고 있는 어떠한 달 표면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이미지의 해체를 선택했다. 그의 화폭에는 구체적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으며 오로지 은유적 상징만이 화면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 은유적 상징조차 불명확하다. 그의 화폭에서 차가운 빙판 위를 지나간 날선 스케이트 자국을 연상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개인적 체험에 의한 유추에 불과할 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떠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연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해가 지는 어스름 속에서 정원을 산책하는 이미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지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이는 푸른 어둠은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나뭇잎이나 넝쿨이 우거진 숲속을 연상한다고 한들 전혀 어색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명확성이 우리의 사유를 자유롭게 그리고 우리의 의식을 확장 시켜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화폭에서 찾아낸 리듬을 지닌 단순한 선과 그 선에서 유추한 은유적 상징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더하여 우리의 체험 안에서 그리고 체험의 개연성 속에서 풍부한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의 선들이 주는 탄성과 속도감은 수없이 많은 의미의 재조합을 만들어낸다. 권은희는 이처럼 구체적 이미지들을 해체함으로써 보다 더 풍부한 의미들을 조합할 수 있는 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 표현방식은 일종의 자동기술법에 기초한다. 마치 꿈과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일정한 선율의 리듬에 실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자동기술법이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나 욕구가 논리적인 통제를 받기 이전의 상태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권은희의 작업 역시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을 기초로 꿈과 현실, 지상과 천상, 의식과 무의식, 현상과 본질의 대립과 통일을 지향한다. 이처럼 권은희는 무의식적 이미지와 비논리적 몽타주가 반복을 통해 자신만의 형상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던져 놓은 이미지의 단서를 쫒아 자신의 체험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그 세계를 작가는 “내가 진정 머무르고 싶은 그곳”으로 설정한다. 따라서 작품은 그곳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작가가 말하는 그곳은 어떤 곳인가? 그는 그곳을 별이 되고 달이 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별과 달은 곧 꿈이다. 언제나 저 편인 곳. 그곳은 실재하지 않는 곳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가 펼쳐지는 의식의 세계이다.
바로 그 자유의 추구가 작가 권은희의 주제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어떠한 자유와 마주하게 될 것인가?
이 역시 수용자의 몫이 될 것이다.

김백균/미학,중앙대교수

Reminiscing...



먼 이국땅에서 한국 채색화와의 조우는 흔치 않은 안복(眼福)을 누리는 일이다. 한국의 종이, 장지(壯紙)에 아교포수(泡水)를 거치고 천연 염료인 분채(粉彩)와 아교를 섞어 완성해가는 과정은 끈기와 정성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채색작업 내내 섬세하게 농도를 조절해야 하는 아교의 사용에는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숙련됨과 세심함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의 숙성과정을 거쳐서일까? 짧은 붓질로 쌓아 올리듯 입혀진 색채들은 때로는 자연색의 원시적인 생생함을 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빛 아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내기도한다. 광물, 흙, 식물에서 채취된 채료(彩料)들이 화학안료로는 흉내 내기 힘든 깊이 있는 어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이 작가의 세상을 이해하고 느끼는 방식, 숨겨진 욕망이나 열정을 표출하는 매개체라면, 작가 권은희가 화폭을 빌어 표현하고자 하는바는 무엇일까? 구속적인 형식과 형상의 틀을 깨뜨려가는 여러 실험 과정과 휴지기를 거치면서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화두(話頭)는 “자유로움”이다. 현실의 답답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해체되거나 재구성된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를 화폭에 담아내는 행위 자체가 자유로의 비상인 것이다. 이제 이 자유로움은 벽을 넘어서 외부로의 탈출과 확장, 역동과 변화에 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수면 아래로 침잠하거나,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관조, 반추하며, 숨겨지거나 잊혀졌던 비밀스러운 욕망이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에 있다.

작가가 창출해낸 색과 형상들은, 단순한 기억의 복사물, 과거의 재현이 될 수 없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들판과 산, 감상적인 사연이 얽힌 꽃과 나무들이지만, 시간이 때가 묻고, 다른 경험과 정서들에 의해 굴절되거나 정제되어 새로운 기억과 시제(時制)의 층을 형성한 이미지들이다. 내면에서 숙성된 기억들이 끈기 있게 쌓아 올린 붓질과, 세련되게 배치된 생면, 낯익은 소재 등을 통해 현재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기억들로 가득찬 작가의 세계에서 낯설지 않은, 유사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랍고도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논길을 따라 걷는 노란 병아리에서 유실된 동심을 읽고, 멀리 풍경 소리가 들리던 나른한 여름 한 때를 기억해 내거나, 여러 모습으로 피어나는 꽃들에서 겹겹이 감추어진 자신만의 비밀스러움을 떠올릴 수 있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작가가 창조한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소통의 통로라고 한다면, 여기에 우리의 경험과 정서가 덧입혀지면서 더 이상 작가만의 사적인 공간이 아닌 새로운 의미의 열린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시간의 경계, 피아(彼我)의 경계가 모호해진 유동적 공간에서 우리의 자유로운 유영과 정서적 체험 또한 시작되는 것이다.

도유향(미술사, NYU)